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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lly & Julie

UNIT 2-1

국제 관계의 변화와 대외 교류 탐구 — 고려를 중심으로

10~14세기 동아시아는 송·거란·금이 맞서는 다원적 질서에서 몽골 제국의 일원적 질서로, 다시 원·명 교체로 바뀌었어요. 고려가 그때마다 명분과 실리를 어떻게 저울질했는지 사료와 흐름으로 비교해요.

고1어려움 ★★★★★약 80분#다원적 국제 질서#사대#실리 외교#서희AI와 함께 씀 · 아직 다시 읽지 않음

이 단원을 마치면

  • 10~12세기 다원적 국제 질서 속에서 고려가 거란·여진(금)·송과 맺은 관계를 명분과 실리로 분석한다.
  • 몽골 제국과의 항쟁·강화·간섭이 고려의 정치와 교류에 끼친 영향을 설명한다.
  • 원·명 교체기의 국제 정세가 고려 말 정치 세력의 선택과 조선 건국으로 이어진 과정을 평가한다.
  • 사료의 출처와 맥락(누가, 언제, 왜 썼는가)을 따지며 국제 관계를 해석한다.

다원적 국제 질서와 고려

이 개념 문제 13개 풀기 →

당이 무너진(907) 뒤 동아시아에는 한 나라가 중심이 되는 질서 대신 송·거란(요)·서하·금이 맞서는 다원적 질서가 들어섰어요.

해고려같은 때 동아시아 · 세계
900
901
9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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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18
918~9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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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76~1076
982~992
993
1009
1010~1011
1018~1019
1033~1044
1050~1200 무렵
1054
1096~1270
1097
1104~1109
1115
1126
1126
1127
같은 때 동아시아 — 당의 멸망에서 금의 화북 장악까지
직접 해 보기

이웃 나라 카드로 비교하는 고려의 대외 관계

고려와 후삼국의 나라들

900~936

어떻게 하나가 되었나?

견훤은 오월·후당과 외교 관계를 맺을 만큼 국제적이었으나, 아들 신검과의 왕위 다툼으로 견훤이 고려로 망명하면서 무너졌다.

고려와 거란(요)

926~1019

세 번의 침입을 어떻게 막았나?

연운 16주를 차지해 송을 압박했고, 고려와의 전쟁 뒤에는 고려·송·거란이 세력 균형을 이루었다. 1125년 금에 멸망했다.

고려와 송

1050~1150

무엇을 주고받았나?

문치주의 국가로 군사력이 약해 거란·금에 밀렸다. 고려와는 사신·상인 왕래가 활발했으며, 벽란도가 그 창구였다.

고려와 여진 · 금

1104~1126

가까운 이웃에서 상국이 되기까지

고려는 여진에 관직과 물자를 주어 회유하면서 동북쪽 경계를 지켰다. 동북 9성 반환 뒤 여진은 금을 세웠다.

고려와 몽골 · 원

1231~1363

30년 항쟁, 그리고 간섭

유라시아에 걸친 대제국을 세웠다. 고려는 강화 뒤 원의 부마국이 되어 왕조를 유지했으나 관제 격하·공물 요구 등 간섭을 받았다.

고려와 일본 · 왜구

1274~1380

바다 건너에서 온 위협

가마쿠라 막부는 여몽 연합군의 두 차례 원정(1274, 1281)을 막아 냈다. 14세기 남북조 혼란기에 왜구가 극성을 부렸다.

고려와 명

1388~1388

요동 정벌과 새 왕조

원·명 교체기에 고려 조정은 친원파와 친명파로 갈렸다. 명의 철령위 설치 통보(1388)가 요동 정벌과 위화도 회군으로 이어졌다.

고려와 이웃 나라 — 카드마다 고려와 있었던 일이 해 순서로 나와요.

해 볼 것 · 카드를 나란히 놓고 '고려와 거란', '고려와 여진·금', '고려와 몽골·원'의 사건 수와 기간을 견주어 보세요. 사건을 누르면 그 사건의 원인과 결과가 이어져요.

사료 · 943

훈요 10조 — 거란을 본받지 말라

『고려사』 세가, 태조 26년

우리나라는 예부터 당의 문물을 따랐지만 땅과 사람이 다르니 꼭 같을 필요는 없다. 거란은 풍속과 말이 다른 나라이니 그 옷과 제도를 본받지 말라.

惟我東方 舊慕唐風 文物禮樂 悉遵其制 殊方異土 人性各異 不必苟同 契丹是禽獸之國 風俗不同 言語亦異 衣冠制度 愼勿效焉

이 조항에 나타난 태조의 대외 인식이 10세기 말 거란과의 관계에 어떻게 이어졌는지 설명해 보자.

훈요 10조 제4조 (『고려사』 세가) — 원문과 요약

사료 · 993

서희의 외교 담판

『고려사』 열전, 서희

(거란 장수가 고구려 땅은 거란의 것이라 하자) 서희가 답했다. 우리나라가 곧 고구려를 이은 나라라서 이름을 고려라 하고 평양을 도읍으로 삼았다. 땅의 경계를 따지자면 거란의 동경도 모두 우리 땅 안에 있으니, 어찌 우리가 침범했다고 하겠는가.

我國卽高句麗之舊也 故號高麗 都平壤 若論地界 上國之東京 皆在我境 何得謂之侵蝕乎

서희가 거란의 속뜻을 어떻게 읽고 협상을 이끌었는지 송·거란·고려의 관계 속에서 설명해 보자.

서희의 외교 담판 (『고려사』 열전) — 원문과 요약
같이 풀어 보기 1사료의 출처 따지기

서희의 담판과 훈요 10조는 모두 『고려사』에 실려 있어요. 『고려사』는 조선 초(1451)에 조선의 학자들이 고려의 기록을 모아 편찬한 책이에요. 이 사실은 사료를 읽을 때 어떤 점을 생각하게 하나요?

▸ 풀이 보기

고려 당시에 쓴 기록 그대로가 아니라, 고려를 무너뜨린 조선이 자신의 관점(고려 말의 혼란을 강조하는 등)으로 고르고 정리한 기록일 수 있어요. 그래서 다른 기록(외국 사신의 기록, 금석문 등)과 대조하며 읽어야 해요.

1018~1019 · 체제 정비와 문벌 귀족

거란의 3차 침입과 귀주 대첩전쟁·외교

고려는 현종의 친조와 강동 6주 반환을 끝내 거부했다. 귀주 대첩 뒤 고려는 거란과 강화해 거란의 연호를 쓰는 사대 관계를 맺었으나 영토와 실리를 지켰다. 11세기 동아시아에 고려·송·거란이 맞서는 다원적 균형이 자리 잡았다.

📍 흥화진, 귀주 · 👤 강감찬, 현종

1126 · 체제 정비와 문벌 귀족

금의 사대 요구 수용전쟁·외교 · 정치

금은 1125년 요를 멸망시키고 고려에 사대를 요구했다. 반대가 컸으나 이자겸 정권은 힘의 차이와 정권 유지를 앞세워 받아들였다. 이는 북진을 주장한 세력의 반발을 낳아 서경 천도 운동으로 이어졌다.

👤 이자겸

사료 · 1128

묘청의 서경 천도 주장

『고려사』 열전, 묘청

(서경의 좋은 땅에) 궁궐을 세우고 왕이 옮겨 가면 천하를 아우를 수 있고, 금나라가 스스로 예물을 들고 와 항복하며 서른여섯 나라가 모두 신하가 될 것이다.

若立宮闕御之 則可幷天下 金國執贄自降 三十六國皆爲臣妾

서경파와 개경파의 주장을 금에 대한 태도와 풍수지리설을 중심으로 비교해 보자.

묘청의 서경 천도 주장 (『고려사』 열전) — 원문과 요약
같이 풀어 보기 2거란에 대한 사대와 금에 대한 사대

고려는 거란과도 금과도 사대 관계를 맺었어요. 두 경우는 어떤 점에서 달랐나요?

▸ 풀이 보기

거란에는 세 차례의 전쟁에서 막아 낸 뒤(귀주 대첩) 강동 6주와 영토를 지키는 조건으로 사대해 실리를 챙겼어요. 금에는 싸우지 않고 힘의 차이와 이자겸 정권의 유지를 앞세워 사대를 받아들였고, 이에 반발한 북진 세력이 서경 천도 운동을 일으키는 등 나라 안의 갈등이 커졌어요.

몽골 제국과 고려

이 개념 문제 7개 풀기 →

1231 · 무신 집권과 몽골 항쟁

몽골의 1차 침입전쟁·외교

고려와 몽골은 1219년 강동성에서 거란 잔당을 함께 무찌르며 처음 관계를 맺었으나, 몽골은 지나친 공물을 요구했다. 1225년 사신 저고여가 피살되자 1231년 살리타가 침입했고, 다루가치를 두고 물러갔다.

📍 귀주

1259~1270 · 무신 집권과 몽골 항쟁

몽골과의 강화와 개경 환도전쟁·외교 · 정치

쿠빌라이는 고려의 풍속을 고치지 않겠다고 약속했다(불개토풍). 강화를 반대한 무신 집정 임연·임유무가 제거되면서 1270년 개경 환도와 함께 무신 정권이 막을 내렸다.

📍 강화도, 개경(지금의 개성)

같이 풀어 보기 3불개토풍

쿠빌라이는 강화 때 고려의 풍속을 고치지 않겠다고 약속했어요(불개토풍). 몽골에 정복된 다른 지역과 견주어 이 약속이 고려에 갖는 의미를 쓰세요.

▸ 풀이 보기

몽골은 금·남송처럼 많은 나라를 무너뜨리고 직접 다스렸지만, 고려는 왕조와 제도, 풍속을 유지한 채 원의 부마국으로 남았어요. 간섭을 받았어도 나라의 독자성을 지킬 수 있었고, 이것이 뒷날 공민왕이 자주성을 되찾는 바탕이 되었어요.

1274~1281 · 원 간섭기

여몽 연합군의 일본 원정전쟁·외교

원은 일본 원정을 위해 정동행성을 두었고(1280), 원정이 실패한 뒤에도 정동행성은 남아 고려의 내정에 간섭하는 기구가 되었다.

📍 하카타(일본 후쿠오카)

1274~1356 · 원 간섭기

원 간섭기의 고려정치 · 사회

2성 6부는 첨의부와 4사로 합쳐지고, 왕의 묘호에 '조·종' 대신 '왕'을 쓰게 되었다. 권문세족은 도평의사사를 장악하고 대농장을 넓혔다. 원은 쌍성총관부·동녕부(1270~1290)·탐라총관부(1273~1294)로 영토 일부를 직접 다스렸다.

📍 화주(쌍성)(지금의 영흥), 탐라(지금의 제주)

흐름 · 중학부터

북쪽 이웃을 상대하는 법

고려는 거란·여진·몽골·명을 각각 어떻게 상대했을까?

고려는 다원적 국제 질서 속에서 명분(사대)과 실리(영토·교역)를 함께 따졌다. 각 대응의 결과(강동 6주, 동북 9성 반환, 원 간섭, 조선 건국)를 비교하면 대외 관계가 국내 정치를 바꾼 과정을 볼 수 있다.

성취기준 [9역10-02] [10한사1-02-01]

북쪽 이웃을 상대하는 법 — 거란·여진·몽골·명 (단계를 누르면 설명)
같이 풀어 보기 4네 이웃, 네 가지 대응

거란·여진(금)·몽골·명에 대한 고려의 대응과 그 결과를 한 줄씩 정리하세요.

▸ 풀이 보기

거란 — 외교 담판과 전쟁 → 강동 6주 확보, 다원적 균형. 여진(금) — 정벌(동북 9성) 뒤 사대 수용 → 전쟁은 피했으나 서경 천도 운동 등 내부 갈등. 몽골 — 30년 항쟁 뒤 강화 → 왕조는 유지했으나 원 간섭. 명 — 요동 정벌을 준비하다 위화도 회군 → 신흥 무인·신진 사대부의 집권과 조선 건국.

원·명 교체와 고려 말의 외교

이 개념 문제 7개 풀기 →
해고려같은 때 동아시아 · 세계
1274~1356
1337~1453
1347~1351
1350~1389
1351
1356
1359~1361
1363 무렵
1366
1368
1376 무렵
1377
1377
1380
1380
1388
1391
1392
같은 때 동아시아 — 홍건적의 봉기, 명의 건국과 원·명 교체

1356 · 개혁과 고려의 멸망

공민왕의 반원 개혁정치

원·명 교체기를 이용한 자주 개혁이었다. 인사권을 쥐던 정방을 없애고 신돈을 등용해 권문세족을 견제했다. 그러나 홍건적·왜구의 침입과 권문세족의 반발, 공민왕의 시해(1374)로 개혁은 멈추었다.

📍 화주(쌍성)(지금의 영흥), 개경(지금의 개성) · 👤 공민왕

사료 · 1388

이성계의 4불가론

『고려사』 열전, 신우

작은 나라가 큰 나라를 거스르는 것이 첫째로 안 되고, 여름에 군대를 일으키는 것이 둘째로 안 되며, 온 나라가 멀리 원정하면 왜구가 빈틈을 노리는 것이 셋째로 안 되고, 덥고 비가 와 활의 아교가 녹고 군사들이 병드는 것이 넷째로 안 된다.

以小逆大 一不可 夏月發兵 二不可 擧國遠征 倭乘其虛 三不可 時方暑雨 弓弩膠解 大軍疾疫 四不可

4불가론과 최영의 주장을 원·명 교체기의 국제 정세 속에서 비교해 평가해 보자.

이성계의 4불가론 (『고려사』 열전) — 원문과 요약

더 앞의 원인

원인

이 사건

1388요동 정벌과 위화도 회군이성계의 4불가론은 작은 나라가 큰 나라를 치는 일, 여름철 출병, 왜구가 틈을 탈 걱정, 장마철에 활의 아교가 풀리고 병이 도는 일을 들었다. 회군 뒤 우왕·창왕이 물러나고 공양왕이 세워졌다.

결과

그다음

—

위화도 회군의 원인과 결과 — 칸을 누르면 그 사건이 가운데로 와요.
같이 풀어 보기 5최영과 이성계, 누구의 판단이 옳았을까

최영은 요동 정벌을, 이성계는 4불가론으로 반대를 주장했어요. 두 사람의 판단을 1388년 무렵의 국제 정세(원·명 교체)와 나라 안 사정(왜구)을 근거로 하나씩 평가하세요.

▸ 풀이 보기

(예) 최영 — 명이 아직 요동을 완전히 장악하지 못한 틈에 철령위 요구에 강하게 맞서 영토를 지키려 했다는 점에서 자주적이지만, 왜구가 들끓는 상황에서 온 나라의 군사를 북쪽으로 보내는 위험이 컸어요. 이성계 — 떠오르는 명과 맞서는 것은 현실적이지 않고 왜구의 빈틈을 걱정한 점은 타당하지만, 회군이 정권 장악으로 이어졌다는 점에서 정치적 의도도 있었다고 볼 수 있어요.

1050~1200 무렵 · 체제 정비와 문벌 귀족

벽란도와 국제 무역경제·교류

송과의 무역이 가장 활발했고, 거란·여진과는 국경의 무역장에서 은과 모피 등을 주고받았다. 대식국(아라비아) 상인은 수은·향료·산호를 가져왔다. 나라가 관리하는 공무역이 중심이었다.

📍 벽란도(예성강 하구), 개경(지금의 개성)

사료 · 1123

『고려도경』 — 고려청자의 빛깔

서긍, 『선화봉사고려도경』 권32

도자기 가운데 푸른 것을 고려 사람들은 비색이라고 부른다. 요즘 들어 만드는 솜씨가 정교해지고 빛깔이 더욱 아름다워졌다.

陶器色之靑者 麗人謂之翡色 近年以來 制作工巧 色澤尤佳

외국 사신이 남긴 기록을 사료로 쓸 때 주의할 점은 무엇일까? (누가, 어떤 목적으로 썼는지)

『선화봉사고려도경』 — 송 사신 서긍의 기록 (원문과 요약)
같이 풀어 보기 6외국 사신의 기록 읽기

『고려도경』은 1123년 고려에 온 송의 사신 서긍이 쓴 책이에요. 이 기록을 사료로 쓸 때 장점과 주의할 점을 하나씩 쓰세요.

▸ 풀이 보기

장점 — 고려 사람이 아닌 외국인의 눈으로 당시 고려의 모습(청자, 풍속, 개경)을 직접 보고 남긴 기록이라 고려 쪽 기록과 대조할 수 있어요. 주의할 점 — 사신으로 머문 짧은 기간에 개경 주변과 상류층을 주로 보았고, 송의 관점(문명의 중심이라는 생각)이 섞여 있을 수 있어요.

흐름 · 초등부터

바다와 길로 이어진 고려

고려는 어떤 길로 세계와 이어져 있었을까?

고려는 송 중심 해상 교역망과 북방 육상 교역망 사이에 있었고, 원 간섭기에는 유라시아 교역망에 편입되었다(중학 역사① [9역04-01] 송·몽골 시기 교역권). 성리학·목화·화약 같은 지식과 기술도 이 길로 들어왔다.

성취기준 [6사04-03] [9역10-04] [10한사1-02-01]

바다와 길로 이어진 고려 — 송 중심 해상 교역망에서 몽골 제국의 교역망까지
이 단원에서 자주 하는 실수
  • 고려가 거란과 맺은 사대는 귀주 대첩 뒤(1019 이후)예요. 전쟁에 지고 맺은 것이 아니에요.
  • 금의 사대 요구를 받아들인 때는 1126년, 이자겸 정권이에요. 이에 반발한 것이 묘청의 서경 천도 운동(1135)이에요.
  • 정동행성은 일본 원정(1274·1281)을 위해 두었다가 남아 내정 간섭 기구가 되었어요.
  • 철령위(명, 1388)와 쌍성총관부(원, 1258~1356)를 헷갈리지 마세요. 공민왕이 되찾은 것은 쌍성총관부 지역이에요.
  • 『고려사』는 조선 초에 편찬되었어요. 고려 당대의 기록이 아니에요.

한 장 요약

한 장 요약

  1. 다원적 질서(10~12세기): 송·거란·금이 맞섬. 고려는 거란과 싸워 이긴 뒤 사대하며 실리를 지켰고(강동 6주, 귀주 대첩), 금의 사대 요구는 싸우지 않고 받아들였어요(1126) → 서경 천도 운동.
  2. 몽골 제국(13세기): 30년 항쟁 → 강화(1259, 불개토풍) → 원 간섭(부마국, 정동행성, 쌍성총관부·동녕부·탐라총관부), 일본 원정 동원. 유라시아 교역망에 들어가 문물이 오감.
  3. 원·명 교체(14세기 후반): 공민왕의 반원 개혁 → 명의 철령위 요구 → 최영의 요동 정벌 vs 이성계의 4불가론 → 위화도 회군(1388) → 조선 건국.
  4. 교류: 벽란도 중심의 공무역(송·일본·아라비아), 거란·여진과 국경 무역, 원 간섭기 성리학·목화·화약의 전래. 사료는 출처와 맥락을 따져 읽어요(『고려사』는 조선 초 편찬, 『고려도경』은 송 사신의 기록).

교육과정 · 2022 개정 고등학교 한국사1 '근대 이전 한국사의 탐구' · [10한사1-02-01] 근대 이전 국제 관계의 변화와 대외 교류(고려 시기를 중심으로, 삼국·조선과의 비교는 다음 판) · 역사 DB(content/history) 고등 층

Practice

문제 풀기 30문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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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동아시아 질서의 중심이던 당이 멸망해 5대 10국 시대가 열린 해를 쓰세요.

    답년
  2. 거란의 1차 침입 때 서희가 담판으로 얻은 압록강 동쪽의 땅은?

  3. 1126년 고려에 임금과 신하의 관계를 요구하고, 고려가 이를 받아들인 나라는?

  4. 원이 일본 원정을 위해 두었다가 원정이 실패한 뒤에도 남아 고려의 내정에 간섭한 기구는?

  5. 주원장이 명을 세운 해를 쓰세요.

    답년
  6. 고려의 국제 무역항 벽란도에 수은·향료·산호를 가져온 상인은?

  7. 거란의 침입과 관련된 일을 순서대로 놓은 것은? (가) 강조의 정변 (나) 서희의 외교 담판 (다) 귀주 대첩 (라) 현종의 나주 피란

  8. 거란이 2차 침입의 구실로 삼은 사건은?

  9. 귀주 대첩 뒤 11세기 동아시아의 모습으로 알맞은 것은?

  10. 윤관이 만든 별무반의 구성으로 알맞은 것은?

  11. 몽골이 1231년 고려에 처음 쳐들어온 구실은?

  12. 쿠빌라이가 고려와 강화하며 약속한 '불개토풍'의 뜻은?

  13. 원 간섭기에 원이 고려 땅 일부를 직접 다스리려고 둔 기구가 아닌 것은?

  14. 원 말기에 백련교를 믿는 농민들이 붉은 두건을 두르고 일어난 봉기는?

  15. 명이 철령 이북의 땅에 두겠다고 알려 와 요동 정벌 논쟁을 낳은 것은?

  16. 고려가 거란·여진과 교역한 방식으로 알맞은 것은?

  17. 다음 대화가 오간 시기의 국제 정세로 알맞은 것은? — (거란 장수) 고구려 땅은 우리 것인데 너희가 침범했다. (서희) 우리나라가 곧 고구려를 이은 나라라 이름을 고려라 하고 평양을 도읍으로 삼았다. 땅의 경계를 따지자면 거란의 동경도 모두 우리 땅 안에 있다.

  18. 다음 글을 남긴 왕의 대외 정책으로 알맞은 것은? — 우리나라는 예부터 당의 문물을 따랐지만 땅과 사람이 다르니 꼭 같을 필요는 없다. 거란은 풍속과 말이 다른 나라이니 그 옷과 제도를 본받지 말라.

  19. 다음 주장을 한 세력이 등장한 직접적인 배경으로 알맞은 것은? — (서경의 좋은 땅에) 궁궐을 세우고 왕이 옮겨 가면 천하를 아우를 수 있고, 금나라가 스스로 예물을 들고 와 항복할 것이다.

  20. 몽골과의 관계를 순서대로 놓은 것은? (가) 강동성에서 거란 잔당을 함께 무찌름 (나) 강화도 천도 (다) 개경 환도 (라) 몽골과 강화

  21. 고려가 원의 일본 원정에 동원된 일에 대한 설명으로 옳은 것은?

  22. 다음 주장에 담긴 판단의 근거가 아닌 것은? — 작은 나라가 큰 나라를 거스르는 것, 여름에 군대를 일으키는 것, 온 나라가 멀리 원정하면 왜구가 빈틈을 노리는 것, 장마에 활의 아교가 녹고 군사들이 병드는 것은 안 된다.

  23. Q23실력① 다원적 국제 질서와 고려서술형 · 스스로 채점

    고려가 거란과 금에 각각 사대 관계를 맺게 된 과정을 비교하고, 두 경우에 고려가 지킨 것과 잃은 것을 쓰세요.

  24. Q24실력④ 대외 교류의 길서술형 · 스스로 채점

    『고려도경』(송 사신 서긍)과 『고려사』(조선 초 편찬)를 고려의 대외 관계를 알려 주는 사료로 쓸 때, 각각의 장점과 한계를 하나씩 쓰세요.

  25. 다음 연표의 (가)~(마) 가운데 정강의 변(금이 송의 수도를 함락)이 일어난 시기는? — 993 서희의 담판 (가) 1019 귀주 대첩 (나) 1107 동북 9성 (다) 1126 금에 사대 (라) 1135 묘청의 난 (마) 1170 무신 정변

  26. 같은 때 세계를 견준 설명으로 옳은 것은?

  27. 다음 연표의 (가)~(마) 가운데 공민왕이 쌍성총관부를 공격해 철령 이북을 되찾은 시기는? — 1258 쌍성총관부 설치 (가) 1270 개경 환도 (나) 1351 홍건적의 봉기(중국) (다) 1368 명의 건국 (라) 1388 위화도 회군 (마) 1392 조선 건국

  28. Q28도전③ 원·명 교체와 고려 말의 외교서술형 · 스스로 채점

    원·명 교체라는 국제 정세의 변화가 고려 말 정치 세력의 교체(권문세족 → 신진 사대부·신흥 무인)로 이어진 과정을, 사건 세 개 이상을 들어 원인과 결과로 설명하세요.

  29. Q29실전 · 2점① 다원적 국제 질서와 고려수능 한국사 · 사료로 사건 찾기 · 변형 유형

    밑줄 친 '이 전쟁' 이후의 사실로 옳은 것은? — 거란의 장수 소배압이 10만 대군으로 쳐들어오자, 강감찬이 흥화진에서 막고 돌아가는 적을 귀주에서 크게 무찔렀다. 이 전쟁 뒤 고려는 거란과 강화했다.

  30. Q30실전 · 3점③ 원·명 교체와 고려 말의 외교한국사능력검정시험 심화 · 시기 판별 · 변형 유형

    다음 상황이 있었던 시기의 사실로 옳은 것은? — 명이 철령 이북의 땅에 위소를 두겠다고 알려 오자, 조정에서는 요동을 먼저 쳐야 한다는 주장과 이에 반대하는 주장이 맞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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